호아나 3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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![]() 1570년 프랑수아 쿨레 가 그린 나바라의 호아나 3세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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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바라의 군주 , 푸아의 백작 | |
재위 | 1555년 5월 25일 – 1572년 6월 9일 |
대관식 | 1555년 8월 18일 포 |
전임 | 헨리케 2세 |
후임 | 헨리케 3세 |
신상정보 | |
출생일 | 1528년 11월 16일 |
출생지 | 프랑스 왕국 생제르맹앙레 |
사망일 | 1572년 6월 9일 (43세) |
사망지 | 프랑스 왕국 파리 |
가문 | 알브레가 |
부친 | 나바라의 헨리케 2세 |
모친 |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|
배우자 |
율리히 클레베 베르크 공작 빌헬름
안토니오 |
자녀 |
나바라의 헨리케 3세
카탈리나 보르보이코아 |
종교 | 개혁교회 ( 위그노 ) |
호아나 3세 나파로아코아 ( 바스크어 : Joana III.a Naffarroacoa , 1528년 11월 16일 ~ 1572년 6월 9일 )는 나바라 왕국 의 여왕이자 푸아 여백작 잔 달브레 (Jeanne d'Albret)이다. 나바라 왕 헨리케 2세 와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,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 의 조카이며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 앙리 4세 (헨리케 3세)의 어머니이기도 하다.
생애 [ 편집 ]
1528년 생 제르맹 앙레(Saint-Guermain-en-Laye)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프랑스 왕족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궁정에서 자랐다. 종교개혁자들의 보호자였던 어머니 마르그리트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위그노 였다. 1541년 외숙부 프랑수아 1세의 명령으로 윌리히-클레베스-베르그(Jülich-Cleves-Berg)연합공국의 빌헬름 5세( 클레페의 앤 의 오빠)와 결혼했으나 4년 뒤 이 결혼은 무효 처리가 됐고 그녀는 방돔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 과 결혼했다.
나바라 왕국은 살리카 법 의 적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헨리케 2세의 사후, 호아나는 남편 앙투안과 함께 나바라의 군주로 즉위했다. 앙투안은 나바라의 명예왕 으로서 안토니오로 불리게 된다. 호아나는 곧 나바라의 국교를 개신교로 지정하고 가톨릭을 배격했다. 그러나 1560년 샤를 9세 치하에서 남편 안토니오는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아들 헨리케 또한 개종시켰다. 1562년 위그노 전쟁 이 발발하자 부부는 가톨릭 진영과 위그노 진영으로 갈라서서 대치했고 안토니오는 루앙에서 전사했다. 샤를 9세 의 어머니로 당시 왕태후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 는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양 진영의 대표적인 인물을 결혼시키기로 했다. 가톨릭 진영에서는 샤를 9세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가, 위그노 진영에서는 호아나의 아들인 헨리케가 선택되었다. 호아나는 이 결혼을 탐탁치 않아 했으나 카트린의 설득에 결국 승낙했고 1572년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간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. 그녀의 사인에 대해서는 카트린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설과 지병으로 병사했다는 설이 존재한다.
자녀 [ 편집 ]
두 번째 남편 앙투안 드 부르봉와의 사이에서 3남 2녀가 태어났다.
- 앙리 드 방돔 공작(1551~1553)
- 헨리케 (1553~1610)
- 루이 샤를 드 마를르 백작(1555~1557)
- 마들렌 드 부르봉(1556)
- 카탈리나 나바라 왕녀 (1559~1604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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